1895년 단발령이 공포되고 을미사변이 일어나자,
유인석은 변란의 시대에 의를 아는 유생은 모름지기 거의소청 (擧義掃淸 = 의로써 봉기하여 불의한 집단을 척결한다), 치명자정 (致命自靖 = 스스로 목숨을 끊어 욕을 당하지 않는다), 거지수구 (去地守舊 = 거처를 옮겨 옛 도를 지키며 산다)의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. 이를 ‘처변삼사(處變三事)’ 라 합니다. 이후 이는 도의를 중시하는 유생들의 행동 지침이 됐습니다.
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
이 지침에 따라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했고, 상당수 유생이 자결했으며, 망명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. 그런데 ‘치명자정’과 관련해서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. 모처에 가문으로나 학문으로나 유명한 유학자가 있었는데 (사자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라 실명은 쓰지 않습니다), 그 제자들은 목숨이 아까워 의병을 일으킬 생각도, 재산이 아까워 망명할 생각도 없었습니다.
그들은 제 땅에서 계속 편히 살면서도 명예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자기들 스승이 자결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. 그런데 아무리 봐도 스승은 자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. 이러다 스승이 “의병을 일으키자”고 나서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한 그들은, 스승 집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모여 앉아 “스승님, 제발 목숨만은 끊지 마십시오”라고 큰소리로 울부짖는 시늉을 했습니다. 이 소문은 곧 인근 지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. 스승은 자기더러 죽으라고 ‘쇼’를 하는 제자들이 괘씸했지만, 이미 소문이 퍼진 마당에 죽지 않았다간 가문에 먹칠하게 될까봐 어쩔 수 없이 ‘자결’했습니다. 아마 제자를 잘못 가르쳤다고 자책하며 죽었겠죠.
황교안 대표가 단식을 시작한지 이제 겨우 엿새째인데, ‘황교안 당대표 순국 대비 국민장의위원회’가 발족했답니다. 저 위원회를 만든 사람들은 황교안 대표 지지자를 자처한다는데, 황교안 대표 눈에 저들이 어떻게 보일까요? 자기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곁에 둘러싸여 있는 심정을 생각하면, 황 대표도 참 안 됐습니다. 저런 인성(人性)을 가진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건,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입니다. 지금이라도 자기 지지자들의 ‘인성(人性)’이 어떤 수준인지 깨닫는다면, 앞으로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.